🏛️고대시대 플라톤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보았어요. 📜 세상을 직접 창조한 신은 오히려 저 아래 단계에 두고, 순수한 ‘이성’의 신을 가장 높은 우두머리 신으로 여겼어요. 그들은 이 수많은 신이 함께 어우러져 우주의 질서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했어요. 🌌 하지만 신들끼리 구체적으로 어떻게 통제하는지, 혹시라도 의견이 상충할 때는 어떻게 조율하는지 시원한 해답을 주지는 못해요. 어쨌든 그들의 논리 속에서도 최고 정점에는 ‘이성’으로 세상을 출발시킨 유일한 신이 자리 잡고 있어요. 🧭
이러한 옛 철학자들의 모호한 신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확한 기준을 세워주셨어요. ⚡ 만약 신이라는 존재들이 자기들끼리 충돌하거나, 악한 영들이 서로 편을 갈라 쫓아내며 싸운다면 그 신들의 나라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냐는 말씀이에요. 🛑 이 말씀처럼 참된 신은 오직 한 분 뿐이며, 세상이 말하는 다른 신령한 존재들은 그 유일신이 지어낸 피조물에 불과한 것 아닐까요? 🌎
🗣️ 신과 인간을 잇는 인격적 소통(커뮤니케이션)과 ‘바라’의 비밀 🔑
다음으로는 우리가 정말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핵심이 바로 ‘소통(커뮤니케이션)’이에요. 💬 만약 신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대화나 교감이 통하지 않는다면, 우리 입장에서 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. 신과 아무런 연관성도 맺지 못한다면 그 존재 자체를 깨달을 길도 없으니까요. ❓ 만약 소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면 태초에 우주가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, 히브리어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에만 쓰이는 단어인 ‘바라’ 역시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에요. ✨
더욱이 신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다면, 인간은 신을 신뢰할 수도 감각할 수도 없어요. 👁️ 우리는 사람이 아닌 사물이나 다른 동물과는 영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으니깐요. 🐾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여기 살아 숨 쉰다는 것 자체가, 우리가 신의 어떤 인격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닮았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돼요. 👤 조금 어렵게 들릴 수도 있지만, 신과 인간 사이에 대등하게 이어지는 공통분모가 없다면 언어가 되었든, 마음의 느낌이 되었든, 겉모습이 되었든지 간에 애초에 소통이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? 💞

⛪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이 확증하는 삼위일체의 신비 🕊️
이 위대한 유일신 신앙의 신비를 개혁주의 교리의 기둥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은 이렇게 명쾌하게 확증해 주고 있어요. 📝
문 . 하나님의 신격에는 몇 위가 계십니까? 🤔 답 . 하나님의 신격에는 세 위가 계시는데,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세요. 이 세 위는 한 하나님이시며, 본질이 동일하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죠. 👑
이 문답의 고백은 하나님의 세 위격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면을 바꾸어 쓰듯 변하는 존재(이단 사상인 양태론)가 아니라, 각각 구별된 인격으로 영원히 계시면서도 그 본질과 영광은 완벽한 하나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어요. 🤝
📜 구약 성경의 복수성: 히브리어 ‘엘로힘’과 ‘에하드’의 오묘한 문법 🔍
실제로 구약 성경은 유일신 사상을 아주 강력하게 외치면서도, 히브리어 원어의 오묘한 문법을 통해 하나님 내부에 존재하는 복수성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어요. 📖
- ‘엘로힘(אֱลֹהִ֑ים)’ 명사와 단수 동사의 절묘한 조합 (창세기 1:1): 태초의 창조를 선언하는 첫 대목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는 복수형 명사인 ‘엘로힘’이에요. 🪐 그런데 신기하게도 ‘창조하셨다’라는 동사인 ‘바라(בָּרָ֥)’는 3인칭 단수형으로 적혀 있어요. 주어는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로 받아치는 이 이례적인 문법적 파격은, 복수의 위격으로 계시지만 사역과 본질에서는 언제나 한 분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창조의 첫 페이지부터 인장처럼 찍어 보여주는 것이에요. 💥
- 온전한 연합의 깊이를 담은 ‘에하드(אֶחָֽ)’ (신명기 6:4): 이스라엘의 위대한 신앙 고백인 쉐마에서 “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(에하드) 여호와”라고 고백할 때, 이 ‘에하드’는 단순히 홀로 떨어진 숫자 ‘하나’만을 뜻하지 않아요. ☝️ 이는 신랑과 신부가 합하여 ‘한(에하드) 몸’을 이룬다는 창세기의 표현처럼, ‘구별된 개체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로 녹아든 상태(복합적 단일성)’를 품고 있어요. 💍
💡 신약 성경의 정밀한 증언: 헬라어 ‘프로스’와 단수형 ‘이름’ 🌟
그리고 신약 성경 시대로 넘어오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이 신비로운 베일이 완전히 걷히게 돼요. 🕊️ 신약의 헬라어 문장들이 이를 아주 정밀하게 증언하고 있어요.
- 인격적인 마주 봄과 동등한 신성: ‘프로스(πρός)’ (요한복음 1:1): “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”라는 구절에서 ‘함께’에 해당하는 헬라어 전치사는 ‘프로스(πρός)’를 사용해요. 👀 이것은 그저 나란히 서 있는 공간적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, ‘서로 눈을 맞추며 깊은 인격적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상태’를 뜻해요. 그리고 곧바로 “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”고 덧붙임으로써, 성자와 성부가 마주 보는 독립된 위격이시면서도 본질은 완벽히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명하고 있어요. ❤️
- 세 위격 속에서 빛나는 단수형 ‘이름’ (마태복음 28:19): 지상 대명령 선언 속에서 예수님은 “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” 세례를 주라고 명하세요. 🌊 성부, 성자, 성령 세 분의 대상을 차례대로 나열했기 때문에 문법 법칙대로라면 복수형인 ‘이름들’이 되어야 마땅하지만, 성경은 단수형 명사인 ‘오노마(ὄνομα, 이름)’를 썼어요. 이 또한 구별되시는 세 위격이 오직 하나의 영광스러운 권세와 신성을 완벽하게 공유하고 계심을 문법적인 단수 표현을 통해 뚜렷이 밝혀 주신 것이에요. ⭐
👁️ 가시광선 영역을 너머 구약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✝️
하나님과 성령님은 가시광선영역에서의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어요. 🚫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가시광선영역만의 존재라는 이야기도 아니에요. 창조자이신 예수님이 자기의 인식환경을 만드셨기에, 그분의 기준으로 조건으로 만드셨기에 만약 예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도 찾을 수도 느낄 수도 없어요. 🌈 우리가 보는 구약성경에 실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결국 대부분 예수님이에요. 이는 특히 예수님에대해서 잠언 8장에 자세히 나오고 있어요. 👑 아무튼 성경을 읽으실 때 혼란스러우시다면 무조건 예수님을 대입해서 읽어보세요. 아마 성경이 달라 보이실 거에요. ✨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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